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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풍경

자욱한 사랑 - 김혜순

푸른밤파란달 2020. 9. 5. 16:41

자욱한 사랑  
 
 
 
김혜순  
 
 
세상에! 네 몸 속에 이토록 자욱한 눈보라!
헤집고 갈 수가 없구나
누가 가르쳐주었니?
눈송이처럼 스치는 손길 하나만으로
남의 가슴에 이토록 뜨거운 낙인 찍는 법을
세상에! 돌림병처럼 자욱한 눈보라!
이 병 걸리지 않고는 네 몸을 건너갈 수가 없겠구나  
 
갓 세상에 태어난 어린 새들이
모두 이곳으로 몰려와 털갈이라도 하고 갔니?
어린 시절 뜬금없이 재발하던 결핵이라도 도졌니?
몸 속이 너무 자욱해
내 발등 위로 쌓이는 눈송이들
이 세상 시간 밖으로 쫓겨난 건 아니니?  
 
네가 태어나기 전 먼먼 옛날부터
뜨거운 손길로 아가의 심장을 만들어오시는 그분이
아무도 몰래 넣어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주머니
그 별이 터져서 네 몸 속에서 쏟아지고 있는가 봐
이제로부터 이 별은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는 거야  
 
모든 삶의 밑바닥에는 끔찍하게 무겁고, 끔찍하게
힘들고, 끔찍하게 뜨거운 것 있잖아?
그 뭉쳐진 것이 터지는 날
세상에! 눈보라처럼 흐느끼는 바이러스 같은 것!
나 어떻게 이 숨찬 눈보라 건너가지?
사랑은 사랑이 있는 곳에서 가장 많이 모자란다는데 
 
 

 


 
+) 눈을 녹여내는 어린 새싹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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