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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풍경

편지 - 이성복

푸른밤파란달 2020. 9. 4. 15:39

편지 
 
이성복 
 
 
1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 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 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 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2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기억(記憶)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 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할 수 없소
결혼할 거라고 믿어요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3
그 곳에 다들 잘 있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어쩔 수 없이 다들 잘 있다고 나는 말했지요.
전설 속에서처럼 꽃이 피고 바람 불고
십리 안팎에서 바다는 늘 투정을 하고,
우리는 오래 떠돌아 다녔지요.
우리를 닮은 것들이 싫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만나 가까워 졌지요.
영락없이 우리에게 버려진 것들은
우리가 몹시 허할 때 찾아와 몸을 풀었지요.
그 곳에 다들 잘 있냐고 당신은 물었지요.
염려마세요.
어쩔 수 없이 모두 잘 있답니다. 
 
 
4
당신을 맞거나 보내거나 저렇게 무한정 잎을 피워올린 과일나무 둥지처럼 저희는 쓸쓸합니다 당신이 저희 곁에 오시거든 무성한 저희 잎새를 바라보시기를 
 
저희 사랑이 꽃필 때 저희 목숨은 시들고 수없이 열매들을 따낸 과일나무처럼 저희 삶은 누추합니다 당신이 저희 곁을 떠나시거든 저희를 닮은 비틀린 나무들을 지켜보시기를 
 
어두운 곳에서 옷을 벗다 들킨 여인처럼 저희 꿈은 자주 놀란답니다 갑자기 끊긴 아이의 울음처럼 캄캄히 멎은 저희 기도를 기억하시기를, 당신의 먼 길을 저희가 기억하듯이 
 
 
5
늘 멀리 있어 자주 뵙지 못하는 아쉬움 남습니다 간혹 지금 헤매는 길이 잘못 든 길이 아닐까 생각도 해보고요 그러나 모든 것이 아득하게 있어 급한 마음엔 한 가닥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이젠 되도록 편지 안 드리겠습니다 눈 없는 겨울 어린 나무 곁에서 가쁜 숨소리 받으며 
 
 
 
+) 잘 있지말아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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