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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풍경

겨울편지 - 안도현

푸른밤파란달 2020. 9. 2. 12:31

겨울 편지  
 
 
―안도현(1961∼ )  
 
댓잎 위에 눈 쌓이는 동안 나는 술만 마셨다
눈발이 대숲을 오랏줄로 묶는 줄도 모르고 술만 마셨다 
 
거긴 지금도 눈 오니?
여긴 가까스로 그쳤다 
 
저 구이(九耳) 들판이 뼛속까지 다 들여다보인다 
 
청둥오리는 청둥오리 발자국을 찍으려고 왁자하게 내려앉고,
족제비는 족제비 발자국을 찍으려고 논둑 밑에서 까맣게 눈을 뜨고,
바람은 바람의 발자국을 찍으러 왔다가 저 저수지를 건너갔을 것이다 
 
담배가 떨어져 가게에 갔다 오느라
나도 길에다 할 수 없이 발자국 몇 개 찍었다
이 세상에 와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것을 
 
땅바닥에 찍고 다니느라
신발은 곤해서 툇마루 아래 잠들었구나
상기도 눈가에 물기 질금거리면서, 
 
눈 그친 아침은,
그래서 이 세상 아닌 곳에다 대고 자꾸 묻고 싶어진다
넌 괜찮니?
넌 괜찮니? 
 
 
 
 
 
+)사진은 카톡으로 받은 다른 분 작품. 눈이 많이 오면 좋겠다. 여기는 눈이 조금만 쌓여도 차들이 못 다니니.... 펑펑 쏟아 는 동안에는 한 밤보다 고요할테다. 더럽고 어지러운 풍경도 하얗게 덧칠이 되서 견딜만해질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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