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여름 어느 날 서울 돈의동 위창 오세창의 집에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오세창이 누구던가. 20세기 초 조선 최고의 안목을 지닌 문예인이자 컬렉터였다.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고 싶습니다.” “이유가 뭔가?” “조상의 정신을 지키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어서입니다.” “돈이 꽤 많이 들어가는 일이네.” “알고 있습니다.” 1935년 서울의 일본인 골동품상 마에다의 집. 고려청자 한 점을 놓고 일본인 마에다와 전형필 사이에 조용하지만 긴박한 얘기가 오가고 있었다. “2만원을 내셔야 합니다. 그 아래로는 어렵습니다.” 청자 하나 값이 2만원. 당시 괜찮은 집 한 채가 1000원이었다. 그건 최고의 고려청자로 꼽히는 12세기 청자상감구름학무늬매병(국보 제68호)이었다. 전형필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 청자는 원래 개성에서 도굴 당한 것이었다. 도굴꾼은 이 청자를 대구의 한 치과의사에게 4000원에 팔아넘겼다. 그 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마에다에게 1만원에 넘어갔다. 이 명품 청자에 대해 전해 들은 전형필은 사진을 접한 뒤 이를 꼭 되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마에다는 전형필에게 수작을 부렸다. “조선인이 이 물건을 탐내다니. 어디 너희가 구입할 수 있는지 보자.” 그런 속셈으로 2만원이라는 거금을 불렀다. 당시 서울의 가장 좋은 집 스무 채 값을 부른 것이다. 하지만 전형필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좋습니다. 2만원을 드릴 테니 이제 청자를 내어주시지요.” 놀란 쪽은 오히려 마에다였다. 전형필이 2만원에 이 청자를 구입했다는 소식이 퍼져나갔다. 오래전부터 이 청자를 탐내고 있던 한 일본인은 아차 싶었다. 그는 전형필에게 4만원에 사겠다고 했다. 전형필로서는 거저 2만원의 차액을 건질 수 있는 기회였다. 전형필은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우리 문화재의 정신이었다 현재 국보 제294호로 지정된 백자 청화철화진사 국화난초무늬병(18세기 전반)이다. 푸른색, 흑갈색, 붉은색이 돋을새김 무늬와 조화를 이루는 이 작품은 청초하고 세련된 분위기가 돋보이는 조선백자의 걸작이다. 그때 전형필은 치솟는 경매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1만4850원의 거금을 제시해 일본인을 떨쳐내고 이 청자를 사들였다. 당시 이 작품의 경매는 장안의 화제였다. 청자가 1만원을 넘은 적은 있지만 백자가 1만원을 넘은 건 처음이었다. 경매 출발가는 800원이었지만 예상을 뒤엎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순식간에 1만원까지 올라갔다. 전형필의 일본인 경매대리인은 값이 너무 뛰어올라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당황한 대리인은 전형필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내 다시 응찰 경쟁을 했다. 우리 문화재를 지켜야 한다는 전형필의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형필은 일본에 있는 영국인 변호사 존 개스비를 설득해 그가 소장하고 있던 고려청자 명품을 다량으로 구입하기도 했다. 1937년 전형필은 평소 알고 지내던 중간 골동품상으로부터 “개스비가 귀국하기 위해 청자를 처분하려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전형필은 지체 없이 땅을 팔아 돈을 마련해 도쿄로 건너갔다. 청자기린모양향로(국보 제65호), 청자상감연못원앙무늬정병(국보 제66호), 청자오리모양연적(국보 제74호), 청자원숭이모자(母子)모양연적(국보 제270호)…. 전형필은 개스비가 소장하고 있던 고려청자 명품들에 매료됐다. 감격에 겨워 개스비가 달라는 돈을 주고 10여 점을 모두 사들였다. 지불한 돈은 10만원이 넘었다. 전형필은 1942년 경북 안동 한 고택에서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걸음에 달려가 1만1000원의 거금을 주고 이를 사들였다. 전형필은 값을 후려치는 일이 없었다. 주인이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소액을 요구해도 전형필은 물건에 상응하는 거금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