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2003년 6월 16일 전라도일주(2) 화엄사, 연곡사, 광한루원, 만복사지 본문

지구별 여행자

2003년 6월 16일 전라도일주(2) 화엄사, 연곡사, 광한루원, 만복사지

푸른밤파란달 2020. 10. 15. 14:27

6월 16일.새벽 5시...자동이다. 누워서 YTN을 좀 보다가 꼼지락꼼지락 6시 30분쯤에 숙소에서 나왔다. 여행을 하게 되면 여관이나 민박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다. 내가 이용해본 '여관'중에선 최악이었다. 유일한의 호러소설에 나오는 여관집 같았다. 겉은 멀쩡하더만...

공용버스터미널은 어제 길가던 아줌마한테 물어본터라, 배낭 끈을 바짝 조이고 열심히 걸었다. 그 기세라면 국토종단도 문제 없을 정도로...^^; 오호 북부시장이군 좀만 더 가면 아 저번에 택시 탈 때 꺽어졌던 길이군. 저 아가씨한테 함 물어봐야겠다. 아가씨 엉뚱한 소리를 한다. 내가 왔던데로 돌아가란다. 아가씨 그게 아니구 말이야,구례갈껀데. 그럼 터미널에서 타지 말구 길가에 있는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타란다.

 

전라도에는 이런식으로 터미널이 많이 운영된다. 고속버스터미널과 공용버스터미널이 따로 있고, 가끔 시외버스 정류장도 있다. 여튼, 왔던길을 조금 돌아가서 시외버스 정류장을 찾고 구례행 버스표를 사니 5분뒤에 버스가 온다.(버스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 싫은데 잘됐다...)

일정이 구례부터 시작하게 된건, 여행전 하이텔에서 만난 사람들의 화엄사는 평일에도 사람들의 바글바글하더라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서...설마...월요일부터 사람들이 많진 않겠지. 구례에 도착했다. 지리산 여기저기로 가는 버스들이 엄청 많다. 노고단 가는 버스도 있다. 거기 야생식물원인가 뭔가가 있다던데 거 까지 가볼까. 아냐, 예정되로 해야지. 화엄사행 표를 사고, 돗자리에 미련이 남아서 가게를 기웃거리다 접는 방석을 샀다. 혹시나 해서...

아직 이른 아침이라 할머니 한 분과 나만 버스에 타고 있었다. 할머니 곧 내리신다. 혼자 남았다. 화엄사 앞에 내렸다. 내리면서 연곡사 가는 버스를 물어보니 다시 구례로 나가야 된단다. 화엄사 앞의 대형주차장에는 택시요금표가 붙어있는데, 연곡사는 미터요금 대로라고 적혀있다. 택시타고 가까...(바로 옆에 붙어있는 줄 알았음.
1대 700,000 지도에는 바로 옆에 표시되어있음-.-;)

 

 

 

1. 화엄사

큰절이라 진입로가 큰 것 까지는 좋은데, 너무 큰거 아닌가. 무작정 산을 보고 올라가다 보니 매표소가 보인다. 일주문인가, 산문도 하나 보이고. 그 사진은 메모리 부족으로 지워졌나부다. 여튼 산문을 지나도 텅빈 이차선이 끝없이 보인다.

흠, 차 다니는 길 말고, 사람만 다니는 진입로가 있을법도 한데, 오른쪽 은 계곡이고, 왼쪽은 산이다. 계곡 너머에 길이
있나 살펴봐도 워낙 숲이 우거져서 보이지두 않는다. 왠지 차량 진입로에 들어선 것 같아 신경이 쓰인다. 걸어가도 표지판도 안보이고 텅빈 길만 끝없이 이어진다. 그나마 계곡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혼자가도 덜 심심하게 해준다. 맑고 깨끗한 물소리... 이게 지리산 물소리군...


아직 배낭도 익숙하지 않아서 어깨를 파고 들고, 다리도 슬슬 아파오는데 표지판은 안보인다. 이른 아침부터 땀으로 샤워할만큼 걸어서 절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공사중이다. 대략 좋지 않다. 금강문, 천왕문들이 조금씩 옆으로 비껴서 있다. 그래서 꽤 깊이 들어가는 느낌이다. 지리산쪽의 절집들은 대체로 금강문이 있는거 같다. 쌍계사에서 봤던 문수동자와 보현동자를 한번 힐끗 봐주고 경내로 들어섰다. 비어 버린 물병에 물부터 채우고, 당간지주를 살펴본다. 별로 예쁘게 생기진 않았다. 시원스레 뻗은 느낌보다는 왠지 뭉툭하단 생각이 먼저 들 게 하고 모양도 아주 단순하다. 그래도 절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있었던 듯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출처: https://ankh47.tistory.com/55?category=230426 [비밀의 방]

당간지주를 지나, 조금 더 가면 보제루와 범종각을 만나게 된다.기억이 가물가물 하는데, 보제루에선 목판인쇄물이 전시되어있었던 것 같다. 그림과 함께 실린 불교경전이었던 것 같은데, 워낙 절집을 여러군데 한꺼번에 다녀서 정확한지는...게을러서 통 메모를 안한 탓이다. 후회막급-.-; 보제루 마당에 앉아서 물병에 가루 녹차를 타서 한모금 마시며 땀을 식혔다. 너무 이른 탓인지 평일에도 북적인 다는 사람들은 통 보이질 않는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각황전과 대웅전은  좀 놔두고, 옆에 있는 종각부터 본다.(아껴두는 셈이다.) 절집의 종각은 보통 목책으로 둘러쳐져 종을 한번 볼려면 그 목책사이로 겨우겨우 볼 수 있거나 높은 누각에 올려져 있어서 먼발치로 보는 수밖에 없는데, 여긴 안 그렇다

동서로 사자가 한 마리씩 있는데, 동쪽 사자는 입을 다물고 있고, 서쪽 사자는 입을 벌리고 어흥~ 한다. 사진은 서쪽 사자. 그리고 종각의 기둥에 구름 장식이 아주 신기했다. 보통 종각에는 법전사물이 함께 있던데. 여튼 목책이 없어서 좋다.



이제 아껴뒀던 대웅전과 각황전을 보러가야겠다. 대웅전이 중심 전각일텐데, 대웅전보다 각황전의 기세가 더 좋다. 그리고 대웅전앞에 있는 동오층석탑보다 각황전앞의 서오층 석탑이 더 화려하다. 다만,각황전 올라가는 계단은 옆으로 3칸인데 대웅전가는 계단은 4칸이라 각황전에 비해 왜소해보이는 외양을 무마시키려한 듯 하다.

 

원통전과 영전을 지나서 대웅전을 둘러본다. 각황전 때문에 나머지 건물은 조금 심심해보이는 느낌이 드는데, 대웅전은 가까이에서 올려다 볼 때보다, 보제루 마루에 앉아서 전체적인 느낌을 보는 것이 훨씬 좋았다. 화려하지 않고 단아한 모습 그대로의 절집...옆에 붙은 건물보다 크게 지어져서 아, 저기가 주존불을 모신곳이구나, 한눈에 짐작하게 하는곳이다. 기둥사이 간격이 일정해서 안정감을 준다.  대웅전 옆에 명부전이 있는데, 지붕 아래에 연꽃이 예쁘다. 


절집 마당에 나란히 있는 동오층석탑과 서오층 석탑은 신라의 탑이라고 한다. 신라 탑하면 삼층석탑만 있는 줄 알았더니. 두탑이 크기와 모양은 비슷한데, 동오층석탑이 별다른 장식이 없는 반면 서오층석탑은 몸돌에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단순한 경쾌함과 화려함의 조화라고나 할까...

 

대웅전보다는 자연스럽게 각황전으로 먼저 시선이 간다. 거대한 건물과 그 건물에 어울리게 거대한 석등이 있는 곳...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법당이란다. 그 크기만큼이나 위풍당당한 외모에 숨이 막힐 정도다. 이층으로 된 지붕에는  지붕끝마다 풍경이 달려있다.

 

겉에서 보면 이층이나, 속을 통으로 뚤렸다. 2층의 벽은 창으로 둘러져 있어 그리로 들어오는 빛이 아름답다. 임진왜란으로 불타기 전에는 화엄경을 새긴 돌판으로 사방의 벽을 둘렀다고 하니, 그 모습이 상상이 안된다. 공포며, 지붕 아래부분이 너무 화려한 감이 있다. 숙종때 지어진 건물로 국보 67호로 지정되어 있다. 각황전 앞의 석등또한 세계 최대 규모란다. 하긴 왠만해선 각황전 규모에 눌려서 있는 듯 없는 듯 표도 안 난판이다. 6미터가 넘는 높이도, 그냥 눈으로 보기엔 그닥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역시 생긴 모양도 시원시원하다. 눈에 크게 띄는 장식없이 깔끔한데, 지붕돌의 귀꽃이 너무 크지 않나.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뭐든 큼직큼직한 걸 좋아하는 요즘 사람들 입맛에는 맞을라나. 귀꽃이 조금 거슬리기는 한다.지붕돌 위에 귀꽃이며, 상륜부 때문인지 간주석의 장구모양은 왠지 위에서 눌린 듯한 느낌-.-;도 든다. 화사석 아래의 연꽃이 거의 수평으로 펼쳐져 있다.


간혹 5~6명 정도가 넓은 경내를 왔다갔다 할뿐이고 대부분은 지리산을 오르는 등산객인 듯 이내 사라져 버렸다. 보제루 마루에 앉아서 절집 구경하는 맛이 참 좋다.오른쪽(동오층석탑이 있는쪽)으로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인데, 스님들이 공부를 하는 곳인 듯 강의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시간이 아침 8시 30분쯤...가르치는분이 질문을 던지면, 다른 분이 대답을 하고, 다시 보충설명이 따르고...하는 식의 수업이었는데, 그 목소리들도 참 좋았다. 가까이에서 그런 소리를 듣는 것도 처음이라, 거대 사찰의 조용한 아침이 너무 청량하고 좋다.

 

석등옆, 원통전앞에 있던 사자탑이다. 사실 탑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어보인다. 그냥 네모난 돌을 네 마리 사자가 이고 있는 모습이다. 탑이었으나 망가지고 일부만 남은건지 처음부터 그런 모양이었는지 보면 볼수록 이상하게 생겼다. 사자들이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은 탑의 몸돌이라기 보다는 손잡이가 달린 돌로 된 상자같은 느낌이다.


보물상자. 사자머리위에 있는 둥그런 받침은 할머니들이 물독 이고 갈 때 머리에 받치던 것을 생각나게 한다. 너무 크긴 하지만 한편으론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에 갔을 때 그 옆 건물에 봤던 것과 비슷하기도 하다. 기둥대신 여자들이 건물을 받치고 있었는데, 그 머리위에도 저런걸 본 것같다. 특이한 모양 때문인지 보물 제 300호로 지정되어 있다.




각황전왼쪽에 뒤쪽으로 돌아올라가는 계단길이 있다. 효대라고 한단다. 계단이다. 계단 싫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옛날 학교 다니던 생각이 나서 더 괴롭다. 108계단이라 불리던 우리 학교 계단. 오른쪽으로 몇 번 꺽여서 더 계단의 끝을 알 수 없게 한다. 꺽이는 곳마다 석등들이 있다. 새소리, 아래쪽 계곡에서 나는 물소리등도 내 괴로움을 덜어주진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머하러 큰 배낭까지 지고 그곳을 올라갔는지 모르겠다. 나무가 우거져서 아래쪽 경치는 잘 안보이지만, 겨울에 위에서 바라보면 꽤나 멋지겠단 생각이 든다. 힘들 게 올라가보면 또 올라간 값을 한다. 특이하게 생긴 사사자 삼층석탑과 그 앞에 있는 석등을 만나게 된다.



이 탑을 보고 나면 아까, 사자4마리와 몸돌만 남은 물건이 탑의 일부일거라는 추측이 거의 확신에 가까워지게 된다. (여전히 몸돌은 보물상자같이 생각되지만...-.-;;) 탑 아래쪽에 사자네 마리 가운데에 스님이 한분 계시다. 석등아래에도 스님이 있는데, 스님이라기 보다는 보살상같다. 사자 네 마리와 스님이 온몸으로 탑을 받치고 있다고 하더라도 미덥지가 못하다. 사자의 자세는 왠지 원숭이를 연상시킨다.

초점 가출사진1


이 기이한 석탑과 석등에는 전설이 하나 있는데, 석탑 안에 있는 스님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한다. 그리고 석등안에 있는 스님은 효심이 지극했던 연기조사인데, 어머니의 명복을 빌며 차를 공양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눈에 보기에는 석탑아래에 있는 스님이 남자같고, 석등아래에 있는 스님은 여자같다. 돌계단에 앉아서 석등과 탑을 바라보노라면 좌우에 핀 수국이며, 특이한 모양들이  기이한 불교의 세상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석탑은 사자뿐 아니라 사자아래의 받침돌  몸돌에도 조각들이 화려하다.


초점 가출사진2

 아래쪽 절집에는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 그래도 간혹 보였는데, 여기까지 올라오는 사람은 없는 듯...한참을 앉아있어도 혼자다. 시원한 바람에 땀도 다 식고, 돗자리가 있었음 한숨 자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병에 물을 채우고 녹차가루를 풀어넣고, 절집을 나선다. 이제 연곡사로 가야지. 올라올 때 스쳐왔던 부도밭에 가서 부도들도 함 휘~ 둘러보고 한참 열심히 걷고 있는 무쏘 한 대가 선다. 걷는데 좀 지쳐서 무작정 얻어탔다. 타고 보니, 아까 내가 열심히 사진 찍어주던 부부들이다.(부부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걍 부부라고 생각하자.)

 

아저씨가 웃으면서 "태우고 보니 아는 사람이네" 이러신다. 사람도 별로 없고 해서 계속 아저씨가 아줌마만 찍길래 내가 몇 번 두분을 같이 찍어드렸다.  근데 차에 타고 보니 거의 다 내려왔다. 조금 가서 다시 내렸다. 


주차장 앞에 있는 화장실에 가서 시원하게 세수하고 머리는 고물줄로 쫑쫑 묶어매고 나오니 저기 길가의 버스에서
소리치는 소리가 들린다. 스님 한분이 차창밖에 고개를 내밀고 어서오라 손짓을 한다. 배낭을 출렁거리며 뛰어가보니 구례로 나가는 버스다. 손님은 스님과 나뿐이다.

 

그 차 놓쳤음 또 한참을 기다려야 했을텐데 운이 좋다. 스님이 이것저것 물어보신다. 왜 혼자왔냐고 같이 다니면 좋을텐데 어쩌구 저쩌구...이제 어디로 갈꺼냐고 물어보셔서 연곡사 간다니까 스님 말씀 왈 연곡사 절집은 형편없는데, 거기 부도 말고 뭐 볼 게 있나...부도 보러 가시나? 그러신다. 화엄사 스님이라서 연곡사를 그리 말씀하시나 했다. 여행 일정을 물어보셔서 주절주절 대답하니 또 스님 말씀이 절이 그리 좋으면 입산하시지... 그러신다.


2. 연곡사

구례로 나오니 또 바로 연곡사로 가는 버스가 있다. 한시간에 한 대 꼴로 있는 버스라 혹시 한참을 기다려야 되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금방 차가 있다. 버스타고 한참을 간다. 지나는 길에 운조루 표지판이 보인다. 내릴까 잠깐 망설였지만, 동네가 버스다니는 길에서 한참 떨어져 있길래, 걍 간다. 일정이 빠듯하여, 운조루 들여다볼 시간이 없다. 한참 사람들이 타고 내리고 하더니 또 혼자만 남았다. 버스는 이제 커다란 돌들이 있는 깊은 계곡을 끼고 달린다.

지리산이다. 엄청 높다. 계곡도 깊고, 바위들도 커다랗다. 산에는 밤꽃이 피어서, 연두색 눈이 내린 것 같다. 가까이서 보면 벌레같은 밤꽃이지만 멀리서 보니 제법 색깔이 좋다. 버스는 구비구비 산자락을 돌아간다. 드디어 입구다. 버스 기사가 입장료를 내란다. 버스안에서 입장료를 건내고 나니, 버스 기사가 피아골까지 가보라고 한다. 연곡사에서 한 15분만 가면 된단다. 또 슬쩍 마음이 동한다.

차안에서 입장료를 내길래 한참 더 가야 되는줄 알았더니, 버스는 금방 방향을 돌린다. 내려서 걸어올라가는데, 식당이며, 당구장이며 노래방이런 것들 보인다. 여름한철 장사라도 제법 잘 되나. 역시 텅빈 길을 걸어간다. 화엄사 갈 때는 나무라도 우거져서 좋았는데, 한낮의 땡볕을 고스란히 다 받고 걸어간다.

 

조금 가니 연곡사가 나온다. 이런 된장,아까 그 스님 말이 맞다. 절집이 형편없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왠 호랑나비들이 마당에 가득 하다. 나비가 예쁘긴 하지만 그렇게 떼로 덤비니 무섭다. 나방들 같다. 알아서들 도망을 가지만 그래도 밟을까봐 겁난다. (밟고 나면 기분이 아주 언짢을거 같다.)

들어가다 보니 왼쪽으로 석탑 한기가 서 있는데, 멀리서 봐도 모양이 참 이쁘다. 가까이 가서 보니 보물 제 151호란다.

연곡사 삼층석탑

상승감보다는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그동안 삼층석탑에서 별로 느껴보지 못한 것인데, 온화하고 부드러운 그 느낌이 좋아서 한참을 바라다 봤다. 아마 절집에 대한 실망을 이 석탑에서 보상받으려 했던 것 같다.

절집은 뭐 둘러볼 것도 없다. 바로 부도를 찾으러 갔다. 그전에는 부도들은 별로 내 눈길을 끌지 못했다. 흔히 보아오던 봉발이나 석종같이 생긴 부도들은 하나같이 대충대충 만든 듯 삐뚜름한 모양이거나, 최소한의 성의만 느껴지는 그런 석물일뿐이었다. 스님들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도 한몫했겠지.(성직자라면 깨끗하고, 성스러운 직업인데 요즘은 종교불문하고 '진짜'성직자는 드문 것 같다. 아니면 몇몇의 '가짜'성직자들이 전체의 인상을 그렇게 바꿔놓을정도로 악랄하던가...) 햇볕하나 가릴대 없는 절집 사이들과는 달리, 나무그늘로 들어서니 금방 시원해진다.

 

연곡사 동부도

조각이 아주 섬세하고 아름답지만 복잡하거나 화려한 느낌보다는 단정한 느낌이 먼저 든다. 깔끔하고 단정하게 차려입인 아가씨를 보는 것 같다. 쌍봉사 부도도 좋았지만, 동부도는 예쁘다는 느낌을 넘어서서, 뭔가 한단계다른 경지인 것 같다. 에고...말로 설명이 잘 안된다. 조각들 하나하나가 튀는게 없다. 그리고 너무 섬세하다. 부도를 보면 할말이 없어진다.(머 혼자라서 같이 말 할 사람도 없지만...) 머리속에 아무 생각도 안나고 그냥 눈에 보이는 것에 푹 빠지게 된다. 천천히 돌아보며 조각들을 구경하지만 그 조각들 하나하나를 보는 것보다 전체를 보는 것이 훨씬 좋다. 꼭대기의 얹힌 보주는 최근에 얹은것인 듯 색깔이 달라서 흠이라면 흠이겠다.

동부도

상륜부의 가릉빈가 네 마리의 머리가 모두 부서져 있어서 안타깝다. 날개를 활짝 펼친 모습이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다. 일본넘들이 일본으로 가져갈려다가 산길이 험해서 못 들고 갔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구례의 터미널에서 산 방석을 꺼내서 축축한 바닥에 깔고, 부도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냥 마주 앉아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동부도

방석 따위를 깔고 앉는 체질이 아니다. 아무데나 잘 주저앉는 편인데, 왠일로 방석을 샀나 했더니, 그게 운명인가? 땅이 축축하니 물기를 머금고 있어 그냥은 못 앉고 방석이 있으니 너무 좋다.( 이때 딱 한번 꺼내쓰고 그뒤로 한번도 안 썼다.) 이렇게 말없이 마주 앉아서 바라만 봐도 어색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부도가 사람이 아니라서 좋다. 곁눈질도 아니고 그냥 열심히 바라만 봐도 어색해지지 않으니까...

연곡사 동부도
연곡사 동부도비의 귀부

동부도 근처의 비다. 비신은 어디갔는지 없고 역시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다. 거북이 몸통에 용얼굴에, 날개까지 달렸다. 대단한 거북이다.비신을 받치는 곳에 있는 구름무늬가 아주 좋다. 꼭 순정만화의 곱슬머리 같은데, 곡선이 참 예쁘다. 날개달린 거북이가 신기해서 앞에서 보고 뒤에서 보고...

연곡사 북부도



앵앵거리며 달려드는 새카만 모기만 아니라면 오래오래 앉아있고 싶었지만 모기란 녀석의 공격을 감당하기 힘들다.그럼 서부도로 가볼까낭... 옆에 기와장에 40미터라고 적혀있었던가... 북부도는 150미터쯤 올라가야 된다니 천천히 가기로 하고 또 미련곰탱이같이 배낭을 지고 올라갔다. 어라 . 40미터 더 온거 같은데 오르막이라서 더 멀 게 느껴지나. 한참을 올라가다보니 저기에 나무들 사이로 부도가 보인다. 막판 스팟. 거의 뛰다시피 올라가다가 하마트면 뒤로 자빠질뻔했다. 두꺼비란 녀석이 부도로 가는 바로 앞에 떡 버티고 있는 것이다. 두꺼비 자세히 보면 정말 징그럽게 생겼다. 어렸을적에 할머니집에 가면 밤마다 두꺼비들이 서너마리씩 마당을 돌아다녔다. 녀석들 가만 앉아있다가 펄쩍 뛰어오르면 정말 싫다. 

 

 

 

동부도와 모양이나 조각이 비슷하다.차이점이라면 지붕돌이 동부도에 비해 좀 넓고, 조각이 조금더 깊다는 정도 .돌의 색깔탓인지, 마주 대하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나무그늘속에 있던 동부도와는 달리, 환한 햇볕에 드러난 부도는 그 신비한 느낌이 조금 줄어든다. 위대한 작품과 위대한 모방품의 관계인가. 북부도도 아주 뛰어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동부도 생각이 자꾸 나는건... 카메라의 밧데리를 갈고 몇 컷 찍다가 서부도를 찾아서 떠나려는데, 서부도로 내려가는 길에도 왠 두꺼비 한 마리가 버티고 있다. 아까 녀석은 시껌했는데, 이번엔 황토색이다. 한참을 노려봐도 그 녀석 길 한가운데 부티고 섰다. 왔던 길로 돌아갈려니, 시껌한 두꺼비도 여전히 돌계단 위에 있다.

 

 

북부도

 

 

두꺼비한테 놀라고, 꿩한테도 놀라고, 모기한테 물리고 투덜투덜 몇걸음 내려오다가 기우뚱하는데 배낭무게에 못 이겨 넘어지고 말았다. 카메라는 흙바닥에 쳐박혀 버리고 이게 뭔 변고란 말인가.

발목을 접지른거 같았지만, 발목보다 카메라가 더 걱정된다. 작동이 안된다. 밧데리를 완전히 뺏다가 다시 켜니 다행히 LCD에 불이 들어온다. 불국사 모래밭에 삼각대가 넘어져서 쳐박힌 이후로 두 번째. 발목이 시큰시큰한다. 넘어지고보니 그곳이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 앞이었다. (사진이 초점이 안 맞다. 넘어진 직후에 찍어서 그렇다. ㅠ.ㅠ )  의병장을 몰라보고 그 앞을 그냥 지나치려다가 벌 받았나부다.


고광순은 을사조약 이후로 연곡사를 근거로 항일의병운동을 했던 분이다. 그때 일제의 기습을 받아 연곡사도 불타 버렸단다. 우리집,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내가 그 앞에서 넘어진건 우연이 아닐게다.  믿거나 말거나...



서부도로 가는길인지도 모르고 그냥 외길이길래 그쪽으로 한참 가다보니, 풀 넝쿨 사이로 축대의 흔적이 보여서 옛 건물 자리인가 자세히 보려 몸을 그쪽으로 조금 기울이려는 찰나, 푸드득~하면서 꿩 두 마리가 날아간다. 그 축대와 거리가 거의 50미터는 됐었는데도, 조용한 숲속에 혼자 있다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나니 너무 놀래서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그전에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없는 산속은 왠지 발 밑을 조심해서 걸었다. 혹시 두꺼비라도 밟을까봐...

조심조심 내려오다 보니, 한무리의 부도들을 만나게 되었다.

크고 작은 부도들이 여기저기 놓여져 있다. 흔히 보던 부도들이다. 그 사이에 있으니, 서부도가 단연 돋보이긴 하지만,
동부도나 북부도에 비하면 소박한 편이다.

 

소요대사 부도(서부도) 

 

사진이 이상한가, 몸돌들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지 않는 것 처럼 보이네. 중대석이 타원인데다가, 몸돌보다 폭이 작아서 그런지 뭔가 좀 불안해보인다. 귀찮아서 배낭을 배고 사진을 찍으니 사진이 자꾸 흔들린다. 선명한 사진을 찍을려고 반셔터 상태로 초점을 맞추려니, 모기라는 녀석이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마구 물어댄다. 영악한 놈...

소요대사 부도 

 

현각국사 비

고광순 순절비에서 조금 떨어진곳에 있다. 여러조각 난 것을 맞춘 흔적이 보이고, 몸통에 비해 용머리는 너무 크다. 땡그란 눈을 부라리고 콧구멍을 잔뜩 세운 얼굴이 무섭진 않다. 입이 웃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런가... 수염이라고 하기엔 너무 숱이 많은 것 같은데, 바람에 날리는 듯 볼에 바짝 붙어있다.
 
연곡사, 얼른 떠나고 싶어졌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별일도 아닌데, 그때는 너무 놀라고 그래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마당에 가득한 나비들도 징그럽고 절앞에 계곡을 보고 벤치가 몇 개 놓여져 있길래 거기 앉아서 계곡 물소리를 들었다. 열심히 생활전선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계곡 물소리를 전해주려 했는데, 잘 안된다.

 

할 수 없지, 혼자 즐길 수 밖에...물소리가 정말 좋다. 찜찜한 기분도 씻어준다. 오른쪽으로 가면 피아골이고, 왼쪽으로 가면 주차장이다. 어쩔까 망설이다가 주차장으로 간다. (버스 아저씨가 15분이라고 했지만, 북부도 올라갈 때 너무 진땀 빼서 오르막은 싫다.) 주차장으로 가다보니, 산딸기가 혼자 익어간다. 몇 개 따먹고 나니, 그 뒤로 자꾸 산딸기나무만 찾게 된다.  아, 그러구 보니 오전내내 물만 먹고 있었구나. 구례로 돌아가면 밥 먹어야지...쭐래쭐래 내려가는데 한낮의 햇볕은 뜨겁다.


주차장에 있는 화장실에 가서 또 세수를 한판하고, 축축한 손수건도 빨아서 배낭에 걸쳐놓고 나오니, 버스가 한 대 올라온다. 기막힌 타이밍~ 버스가 멈추기 무섭게 올라서니 아저씨가 째려본다. 그러던가 말던가 자리잡고 이어폰을 꽂으니 아저씨 버스 청소하고 깔개 털고, 담배도 피고, 운동도 하고 도무지 출발을 안한다.  의자에 앉아서 꾸벅꾸벅...-.-;;


다시 구례로 나왔다. 이젠 구례터미널이 너무 익숙하게 느껴진다. 남원행 버스를 타야 되는데 버스표를 사고보니 남원행이 바로 5분뒤에 출발이다. 배가 고픈데...-.- 버스 시간들이 너무도 딱딱 맞아서 숨돌릴 틈도 없다. 버스 타는데로 나가보니 버스가 있기는 한데 텅텅 비었다. 그걸 타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고 있는데, 한무리의 아저씨들 중에 한분이 어디 가냐고 물어보신다. 남원 간다니까 완행이란다. 한 30분쯤 더 걸린다길래, 그냥 그걸 탔다. 내가 타자마자 그 어디가냐고 물어보시던 아저씨도 탄다. 운전기사다.

 

몇 명이 더 타서 차가 바로 출발, 구례 시내를 벗어나기도 전에 민방위 훈련에 걸렸다.  공무원들이 차를 세운다. 라디오에서 20분동안 차량 통제 된다고 나온다. 이럴줄 알았음 밥이나 먹을걸... 내 바로 앞에 한 성깔하는 청년이 앉아있었는데, 십원짜리 욕을 하면서 버스도 세운다고 머라머라 한다. 전라도 사투리로 들으니 더 실감난다. 무시라. 버스는 정말 완행이다. 동네마다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동네 안을 들어갔다가 나온다. 중간에 같은 길을  같은 방향으로 두 번 지나가는  황당한 경우도 있다.

 

 

3. 광한루원

 

남원터미널에서 내려서 점심을 먹고, 광한루원으로 출발. 이왕이면 강둑을 따라 걷고 싶어 요천을 따라 걷는다. 제법 강폭이 넓다. 좀 걸어서 광한루원 매표소에 도착했다. 입구에 인포메이션이 있다. 남원시내에선 광한루원과 만복사터 말고는 갈데도 없는데 시내지도 하나를  얻고 광한루원에 들어갔다. 생각보다 꽤 넓다. 친구에게 광한루원에 간다니까 "미성년자들이 연애하던 데?"란다.

 

<줌으로 최대한 땡긴 연꽃, 완월정앞>
<수중누각, 완월정>

 

<못  내부의 3개 섬을 잇는 다리 중 하나>
<오작교>
<광한루>


도심 한복판에 있는 공원답게 많은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완월정, 광한루와 큰 못에 3개의 섬, 오작교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터를 넓혀 월매 집과 전통놀이 체험터를 만들어 놨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할머니 몇분이서 이야기 하고 계신 지붕있는 마루?를 발견하고 나도 그 옆자리에 배낭을 벗었다. 신발 벗고, 올라앉아 배낭을 베개삼아 누워보았다. 신선놀음이 따로 없구만. 한숨 잘까 하고 있는 시끌시끌 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무리의 중딩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뭐지뭐지?? 수학여행온 녀석들이었다. 주섬주섬 배낭을 챙길 수 밖에. 그래도 다행이다. 사진 다 찍고, 다 둘러보고 난뒤에 나타나서.시끄러운건 질색이다.

 

4. 만복사지

 

 

이제 만복사터로 가야지. 한참 걷다가 방향을 확인해보니 반대로 가고 있다. 얘가 날이 더워서 맛이 갔나. 슈퍼에서 더위사냥 한개랑 물 한병 사들고 다시 열심히 걷는다. 드뎌 발견... 발이 아프다.

 

만복사 입구의 석인상

사진에서 보던 석인상을 발견. 길가에 머리만 나와있는데, 꽉 끼도록 갑갑하게 철재 울타리 안에 갇혀있다. 실제로 보면 안쓰러운 느낌에 내가 더 답답해진다. 거기다 바로 옆이 도로라, 저렇게 사진찍는 것도 굉장히 위험했다. 커다란 차들이 쌩쌩 달릴 때마다 길 전체가 울렸다. 저게 무슨 보호란 말인가.

 

몸 전체는 땅에 파묻혀있는데, 왜 발굴을 안하는지 모르겠다. 답사여행의 길잡이편에 보면 당간지주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추정만 하지 말고 발굴을 해서 원래 모습대로 복원해보면 좋을텐데 말이다. 서서 보면 왕방울같은 눈을 부라리고 있는 것 같지만, 앉아서 보면 씩~ 웃고 있다. 귀엽다.

너른터를 철책으로 둘러쳐져있어 아픈발을 무릅쓰고 휘 돌아 입구로 들어갔다. 월장할까도 생각해봤지만(울타리가 허벅지 높이다.) 낯선 동네에서 추하게 굴면 안되는법...꽤 넓은 터가 예전의 영화를 기억하게끔 해준다. 구운몽의 "만복사저포기"에 나오는 만복사터를 내가 밟고 있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온다.


<길쪽을 향해 서 있는 당간지주, 마모가 심하다.>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에 당간지주가 서 있다. 장식이 없고 단순하다. 아래위로 한쌍의 구멍이 완전히 뚫려있어 특이하다.


<석대좌인 듯한 돌덩이>
<그나마 온전한 오층 석탑과 다른 석탑의 흔적>


오층석탑 옆에는 깨진 지붕돌 세 개만 쌓여있는 또 다른 탑의 석재들이 있다. 지붕돌의 크기 비율로 보아 삼층석탑인 것 같다. 오층석탑 뒤로 보이는 건물은 석물입상 보호각이다.

 

서쪽으로 해가 뉘엇뉘엇 기울고 있다. 파란 클로버가 황금색으로 물들어가는 폐사지. 남은 석물 몇 개에서 옛 영화를 떠올려보기엔 왠지 서글퍼진다. 아무렇게나 버려져있는 석재들의 원래 쓰임을 추측해보는 것은 어쩌면 부질없는 짓인지도. 저 거대한 대좌에 있던 부처님은 어디로 갔을까. (사진과는 달리 지름이 3미터쯤 된다.) 석등의 나머지 부분은 어디가고 추측컨데 화사석 받침이었을 저 돌만...고인 물에 벌레들이 앵앵거리고 있다.

오층석탑이라고 하기엔 젤 꼭대기층 지붕돌이 좀 넓은 것 같은데...점점 줄어들다가 갑자기 오층에서 끝나 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약사여래

노을 때문에 더 노랗게 보인다.넘어가는 햇빛 긴 한자락이 석불을 비추고 있다. 손은 따로 만들어 끼우게 되어있는데, 구멍만 남아있어 불쌍해보인다. 불상과 광배가 모두 한돌에 조각되어있고, 조각이 깊다. 광배의 불꽃 조각이 예쁘다.광배 뒤쪽에는 약사여래가 얕게 조각되어있다.


 

 

 

건물들이 있던곳은 주춧돌만 남아있어서 대충 둘러보고 나왔다. 아직 해는 조금 남아있다. 어쩔까...하다 일단 역으로 가기로 했다. 역에도 인포메이션이 있어서 다음 목적지 실상사에 대한 정보를 좀 얻을까 하고... 버스를 탔는데, 역에 내리고 나서 하절기 공무원 근무시간은 18시까지라는것이 생각났다. 해가 남았길래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7시가 다 되가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횡단보도를 건너보니 역시나 문은 굳게 잠겨있다. 이렇게 되면 무작정 실상사로 가보는 수밖에...해가 지면 구경은 할 수 없지만, 이동은 가능하니 실상사 근처에 숙소를 잡고 일찍 움직이자는 계산이었다.

역에서 터미널이 그리 멀지 않았기에, 표지판을 보면서 걷고 있었다. 왼쪽으로 가란다. 왼쪽으로 갔다. 직진이란다. 직진했다. 한 30분을 넘게 걸은 것 같은데 터미널이 안보인다. 어라 이상하다. 그제서야 지도를 꺼내봤다. (표지판이 곳곳에 있어서 지도 꺼내볼 생각을 못했다.) 엉뚱한 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표지판 따라 다녔는데 왜 이래.

 

 

유럽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스페인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그 음악 때문에 꼭 가야 된다고 우겼던 알함브라 궁전. 새벽기차로 그라나다에 도착했다. 큰 배낭은 코인락커에 넣고 친구와 둘이서 표지판을 보면서 알함브라 궁전을 향해 걸어갔다. 제법 걸었다. 내가 알기론 알함브라 궁전은 산 중턱에 있었는데 자꾸 평지로 나간다. 유럽은 지평선에 왠만하면 걸리는 것이 없다. 그냥 무한정 평지다.

 

우리가 가는 방향으로 아무리봐도 산 따위는 없다. .표지판 방향대로 왔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어 오던 방향으로 돌아보니 저기 산밑에 뭔가 건물이 보인다. 반대방향으로 열심히 걷고 있었던거다. 새벽기차로 도착해서 알함브라 궁전까지 가는데 무려 5시간을 넘게 걸었다. 정말 발바닥 아픈 추억이다. (궁전의 아름다움은 그 고통을 충분히 보상해주었다.)

표지판 탓을 하며 투덜투덜...터미널에서 산내면으로 가는 표를 끊고 버스에 탔다. 날이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면소재지니까 여관은 있겠지. 없으면 피씨방이라도 가야지. 대충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맘 한구석에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산내면 간다는 다른 사람을 따라 얼른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슈퍼하나, 다방하나, 식당 두어곳, 파출소 그리고는 깜깜하다.  이게 뭐냐...너무 당황스러웠다. 면사무소 소재지가 이래도  되는거야. 겨우 8시를 조금 넘긴 시간인데 동네는 깜깜하고 저기 교회가 하나보이는데 재워달라해볼까...머리속이 텅빈다. 

 

그래서 무작정 파출소로 갔다. 실상사 갈려고 왔는데, 근처에 민박하는 집이 없냐고 물어보니, 당직경찰관 두분이 나를 황당하게 쳐다본다. 혼자왔냐고 물어본다. 그렇다고 하니까 나이 많으신 분이 여기저기 전화를 해본다. 조금 가면 민박이 많단다. 제일 깨끗한 집으로 골라주겠다며 젊은 경찰에게 어디어디로 데려다 주라고 한다.  졸지에 경찰차도 타보고. 일단 숙소를 구해서 너무 다행이다. 차로 10분 거리라고 한다. 아무생각없다. 10분이면 별로 안 머네...한참 가다보니 민박집이 줄줄이 나온다.

 

제일 안쪽까지 들어간다. 진짜 아무생각없이 그저 고맙다는 생각만 했다. 젊은 경찰이 자기도 대학다닐 때 여행 많이 했다면서...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어색어색. 낼 아침에 실상사가기전에 박카스 사가지고 인사하러 가야지. 그런 생각을 했다. 민박집에 도착했다. 계곡 근처라 물소리가 시원하다. 새로 지은 민박이라 깨끗하고 방도 크다. 산 바로 밑이라 밤공기가 차가워서 이부자리를 펴니 하루살이들의 습격이다. 벌레가 때로 덤빈다. 창문은 모두 잠겼는데 대체 어디로 들어오는지...벌레들을 피해 입구쪽에 이불을 깔고 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