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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유홍준 교수의 국토박물관 순례] 1. 경기 광주 금사리 '백자 달항아리' 가마터 본문
https://news.joins.com/article/242992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온 국민에게 국토와 문화유산의 의미를 감동적으로 서술한 유홍준 교수가 이제 '국토박물관 순례'라는 제목 아래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는 그의 주장을 새롭게 펼쳐 보입니다.
둥그런 조선의 美 혼 쏟아 빚던 그곳
유교수는 역사 현장의 답사, 문화유산의 의미, 미술품의 아름다움, 그리고 인간의 체취가 느껴지는 여행의 즐거움을 그때마다의 주제에 따라 정겹고 맛깔스러우면서도 명징한 문체로 독자 여러분에게 다가갈 것입니다.
한국미술사의 전도사라는 별명까지 갖고 있는 유교수가 이제 명실상부한 '국토박물관'의 길라잡이가 되어 우리 국토와 문화유산의 의미를 한 차원 높이 끌어올릴 것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기대합니다.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팔당호수가 드넓게 펼쳐지며 갈대섬 너머 능내리 마을이 아련히 다가오는 이 풍광 수려한 분원초등학교 자리는 조선백자가 마지막 꽃을 피우고 쓸쓸히 막을 내린 내 마음속 국토박물관 1번지다.
조선백자는 한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내세울 물증으로 백자만큼 명확한 것은 없다. 고아한 순백색, 이지적인 설백색, 순박한 회백색, 따뜻한 유백색, 시대에 따라 빛깔을 달리해왔고, 듬직한 왕사발, 상큼한 앵무잔, 예리한 각병, 넉넉한 항아리, 사랑스러운 연적, 시대마다 형태미도 달리하며 조선백자는 조선인의 맑은 심성과 온화한 서정을 남김없이 담아냈다.
경기도 광주에는 모두 2백89개의 가마터가 남아 있다. 궁중의 부엌살림을 관장한 사옹원(司饔院)에서 직접 운영했던 이 관요(官窯)들은 땔나무 사정 때문에 대개 10년을 주기로 옮겨다녔다.
15세기엔 도마리.무갑리, 16세기엔 우산리.번천리.관음리, 17세기엔 학동리.신대리, 18세기 초반엔 금사리, 그러다 1752년이 되면 이곳 분원리에 터를 잡고 뱃길을 이용해 백토와 땔나무를 들이고 또 완성된 제품을 한양으로 나르며 다시는 옮겨다니지 않았다. 이때부터 이 마을은 사옹원의 분원(分院)이 있다고 해서 분원리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이 되면 국운의 쇠퇴와 함께 분원백자도 말기 현상을 일으켜 형태와 빛깔 모두 정연한 아름다움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때 일본에서는 우리 도공들이 길을 열어준 왜(倭)사기들이 싼값에 조선 땅으로 밀려들어오기 시작하니 분원백자는 경쟁력을 이기지 못하고 1886년 마침내 민간으로 넘어가게 된다.
민간업자 역시 왜사기를 이기지 못했다. 파산과 파산이 여섯 차례나 이어지다가 결국 분원가마는 폐쇄되고 다시는 가마 굴뚝에 연기가 오르지 않게 됐다. 그리고 1923년, 내버린 도편으로 이뤄진 높은 언덕엔 분원초등학교가 세워지며 조선백자 5백년의 역사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지금 분원리 호숫가는 매운탕집과 모텔로 범벅이 돼 있지만 분원초등학교 운동장 언덕바지엔 역대 분원 감독관인 19명 제조(提調)들의 공덕비가 줄지어 있고, 올 9월 경기관광공사에서 수명을 다한 교사를 개조해 '분원 백자관'을 세워 그나마 백자를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 한구석에 위안이 되고 있다.
그러나 분원을 제외한 나머지 가마터들은 지금도 모두 야산에 덮여 있다. 도마리.번천리.관음리.금사리…. 광주 일대 옛 도공들의 마을을 지나다 보면 산기슭 가마터는 나무와 풀섶에 덮여 아는 이조차 알아보기 힘든 둔덕을 이루고 있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서 있는 목장승들은 이 연륜 있는 도공 마을의 내력과 그 시대 그 백자의 모습을 묵묵히 말해 주고 있다.
그 많은 가마터 중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마을은 분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금사리(金沙里)다. 분원백자 바로 직전 1720년 무렵부터 1752년까지 약 30년간 가마가 운영됐던 이곳 금사리는 백자의 제왕이라 할 달항아리의 고향이다.
달항아리-. 그중에서도 높이 40cm가 넘는 백자대호는 그 너그러운 형태미와 따뜻하면서도 지성미 풍기는 은은한 백색으로 우리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최순우 선생은 달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잘 생긴 부잣집 맏며느리를 보는 듯한 흐뭇함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한 미술 애호가는 달항아리를 보면서 "당당하지만 교만스럽지 않고, 부드러우나 알차고, 권위에 차 있으나 내세우지 않는" 위대한 인격의 완성을 읽을 수 있다는 백자송을 지었다.
본래 수동식 물레로는 높이 40cm는 고사하고 33cm의 중호(中壺)도 만들 수 없다. 물레로 성형할 때 젖은 태토가 주저앉아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항아리는 장호(長壺)라고 해서 허리 아래가 홀쭉한 것이며, 중국을 비롯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백자대호 같은 둥근 그릇은 만들지 못했다.
그러나 보름달 같은 백자대호를 만들겠다는 조선 도공의 예술 의지는 커다란 왕사발을 두 개 포개 달항아리를 만들어내고야 만 것이다. 그래서 모든 달항아리는 가운데 잇잠(잇는 부분)이 있고, 그로 인해 달항아리의 둥근 선은 기하학적인 원이 아니라 둥그스레한 곡선을 이룬다. 그 비정형의 둥근 선은 기계적이지 않기 때문에 선맛은 어질고 너그러우며 볼수록 깊은 미감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것은 고유섭 선생이 말한 무기교의 기교며,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갈파한 무심의 경지에서 나온 무작위의 소산이다. 그런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을 김원용 선생은 아주 단호한 시로 대신했다. "조선백자의 미는/이론을 초월한 아름다움/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느껴서 모르면 아예 말을 마시오."
모든 박물관이 희대의 명작 달항아리 하나를 갖는 것은 큰 소망이다. 아무리 미술관의 백자실을 잘 꾸며놓아도 달항아리가 없으면 그 허전함과 아쉬움을 달래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리 예쁜 꽃밭이라도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없으면 명원(名苑)이라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백자대호는 20점 남짓 될 뿐, 그래도 호암미술관.호림박물관은 근래에 좋은 달항아리를 소장하게 됐고, 외국의 박물관들도 우여곡절 끝에 하나씩 갖춰가고 있다.
영국의 대표적인 도예가 버나드 리치는 조선도자에 심취해 1935년 한국에서 개인전을 열고 돌아갈 때 달항아리 하나를 구입해 가면서 "나는 행복을 안고 갑니다"라며 좋아했다. 78년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이를 애제자인 도예가 루시 리에게 주었고, 95년 루시는 죽으면서 이를 다시 버나드의 부인인 재닛 리치에게 주었으며, 98년 재닛이 죽자 이 항아리는 경매에 부쳐졌다.
대영박물관은 한광호 기금으로 이를 매입하고자 했으나 한 한국인이 더 높은 가격으로 낙찰했다. 그러나 때마침 IMF 사태로 환율이 급격히 뛰어오르자 경락자가 포기하는 바람에 지금은 대영박물관 한국실 완자무늬 창살 아래 한국의 미를 대표하며 자리하고 있다.
일본에는 도다이지(東大寺)의 주지스님이 비장해 온 조선백자 달항아리가 있었는데 96년 중앙일보 윤철규 기자가 이를 취재해 소개한 일주일 뒤 도둑이 들었다. 경비원이 이를 보고 소리치며 쫓아가자 도둑이 항아리를 내팽개치고 달아나는 바람에 항아리는 박살나고 말았다. 5백여개의 파편으로 쪼개진 이 항아리는 4년에 걸쳐 완벽하게 복원돼 지금은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에 기증됐다.
경기도 광주 일대 백자 가마터를 지나노라면 차창 밖의 야산마다 백자의 영상과 수많은 이야기가 그렇게 스쳐간다. 유난히도 진달래가 많이 피어나고 코스모스 꽃길이 아름다운 팔당 호숫가 백자 가마터 답사는 으레 초월면 쌍룡리 무명도공의 비 앞에서 갈무리하게 된다. 77년에 세워진 이 비문은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지금도 귀기울이면 백자 항아리 매무새 하나에서도 고된 밑바닥 삶을 값지게 살다간 어질고 착하고 슬기로웠던 수천 수만명의 무명 도공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제 여기 우리들 모두의 마음을 가다듬어 보이지 않는 모습들 앞에 간절한 고마움을 돌에 새겨 바친다."
유홍준 교수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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