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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여행자

2003년 3월 2일 복천동 고분군과 범어사

푸른밤파란달 2020. 10. 14. 17:17

3월 1일...긴긴 겨울을 종지부 찍고, 새봄맞이 봄소풍을 계획 했었다. 그러나 날을 잘못 잡았는지...그날 하루종일 비가 오락가락 하는 바람에 컴컴한 방에서 영화나 보면서 시간을 때웠다. 다음날,그러니까 3월 2일. 어제 비온 이야기는 거짓말인 것처럼 상춘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그래 가자!

 


오랫동안 한번 가봐야지 했던 복천동 고분군과 범어사가 목적지였다. 작년말에 산 '답사여행의 길잡이  경남편'에서 처음 들어본 복천동이라는 지명과 그곳에 4세기부터 6세기까지의 시대별 고분이 113기나 있다는 이야기는 너무 매력적으로 들렸다. 범어사 역시 몇 년전 부모님과 아주 짧은 시간 둘러봤던 기억이 전부인지라 차근차근 훑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복천동 고분군에 갈려면 명륜동 지하철역에서 시립박물관 복천분관으로 가는 마을 버스를 타면 된다. 명륜동지하철 역에 도착한 시간이 정오쯤. 근처의 슈퍼에서 음료수 하나 사고 마을 버스에 올랐다.

 

동래지역을 반달로 둘러싸고 있는 대포산 자락이 남쪽으로 뻗어나온 낮은 구릉에 자리 잡은 복천동 고분군은 4세기에서 6세기까지 가야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야시대에는 금관가야의 변방이었고, 6세기부터는 신라에 병합되어 신라의 변방이 되었던 곳. 시대별로 무덤이 양식이 어떻게 변해갔는지, 가야사람들은 어떤 그릇을 썼는지, 그리고 조금은 섬뜩한 순장의 풍습까지... 야트막한 구릉의 높은 곳은 계급이 높은 사람들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어서 부장품을 묻어두는 딸린 덧덜무덤까지 함께 있고, 남쪽으로 갈수록 시대적으로 앞선 것이라고 한다. 한편, 구릉의 높은곳에 제 53호 54호 무덤의 내부와 부장품을 그대로 재현해놓아(유리돔 부분) 빈약한 상상력을 도와주게끔 되어있다. 고분군은 모든 발굴이 끝난 후 잔디를 입히고 공원처럼 만들어 놓고 무덤이 있던곳은 낮은 관목으로 표시되어있고, 표지석에는 무덤의 종류와 조성시기가 새겨져 있다.

 

긴 겨울을 지나온 탓에 잔디는 노랗게 말라서 바스락 거리고, 관목들도 퇴색된 갈색이었으며  잔디를 보호하자는 푯말은 표지석을 보러가는데 방해가 되었다. 고분군을 둘러싸고 있는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서 왜 벤취도 하나 없나 하는 불평을 해댔다. -.-; 따뜻한 햇볕 쐬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벤취하나가 정말 아쉬웠다. 잔디밭에 그냥 털석 주저앉기엔... 그래도 다른 사람의 무덤이었는데... 기대에 가득차서 유리돔 내부로 들어갔다.

 

 

 

 <유리돔 내부의 제 53호와 54호 고분>

 

 

위쪽의 사진은 제 53호 고분으로 돌덧널무덤이다. 아래쪽은 제 54호로  딸린 덧널이 있는 덧널무덤이다. 직사각형의 네 귀퉁이가 'ㅍ'자 모양으로 파져있다. 돌덧널무덤은 나무로 덧널을 만들고 덧널을 지지하기 위해 돌을 쌓은 경우이고, 덧널무덤은 돌 대신 흙으로 채워 넣은 것이다.

유리돔 내부를 둘러보고 구름 다리를 건너면 부산시립박물관 복천분관이 나온다. 돌로 만들어진 구름 다리 밑으로는 차가 다닌다. 입장료는 500원이고, 내부의 전시물은 빈약하지만 영상자료가 아주 잘 되어있다. 작은 영화관같은 곳에서(영화천국 정모하기에 딱 좋은...^^;)  복천동 고분군에 관한 짧은 영상물을 보고 전시실로 갔다. 사진으로 담기에 딱 좋은 신기한 물건들이 많았지만, 박물관 내부는 촬영금지라서 관리인이 없어도 사진은 안 찍기로 했다. (지난 여름, 경주 박물관에서 사진 찍다가 혼났다. 플래쉬만 안 쓰면 유물에 별 영향을 안 끼치는데. 유럽의 박물관에서 촬영금지표지판을 본적이 없다. 루브르에선 플래시도 썼는데...-.-;)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은 대부분 교묘하게 복재된 모조품이었다.

 

 

 

 

박물관을 나오니 오후 2시쯤. 범어사로 출발해야 될 시간이나, 박물관 뒷편에 있는 동래읍성에 가보고 싶은 생각에 잠깐 망설였다. 에라 모르겠다. 가보자 하고 무작정 박물관 뒷편으로 올라가니 철책이 나온다. 못 넘을 높이는 아니었으나, 월장하면서 까지 스타일 구기기도 그렇고...할 수 없이 구름다리 아래까지 내려와서 다시 옆으로 올라갔다. 복천동 자체도 산허리까지 되는 높은 곳이었지만, 그 위쪽으로도 남루한 인간들의 삶이 있었다. 박물관 뒷편엔 부산시 공무원들이 식목일에 조성했다는 매화동산이 있었는데, 매화가 활짝 피어있었다. 하지만 그 나무들 밑둥근처에는 쓰레기들로 엉망이었다. 그 사이로 난 오솔길을 조금 걷다보니 맞은편에 동래읍성의 성문이 보였다. 방향으로 봐선 서쪽인데 책에는 북문만 남아있다하니 북문인가보다 했다. 그런데 이런 낭패가...보일 듯 말 듯 하던 오솔길이 끊어진 곳에선 북문과 나 사이에 깊은 골짜기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길을 잘못 들었다는 소리.  길은 없고, 아래쪽은 경사가 급한 골짜기고 멍하니 서있자니 나무들 사이에서 난데없이 꿩이 한 마리 부스럭 거린다. 이놈, 너도 길을 잃었냐?  왔던 길을 돌아가기엔 너무 억울해서 없는 길을 헤집고 가니 성벽과 만났다. 넓은 평지의 낙안읍성과는 달리 산을 따라 있는 동래읍성은 전날 온 비 때문에 길은 질척거리고 온통 울퉁불퉁 바위돌이었다. 산위라 그런지 바람도 거세서 성벽을 따라 꽂아놓은 색색의 깃발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부끼고 있었다.



 

 

북문에 올라 임진왜란 당시 "싸워 죽는 것은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며 끝까지 항쟁했다는 동래 부사 송상현에 대해 잠깐 생각을 했다. 다시 구름다리 밑으로 가서 마을 버스를 타는 대신 북문으로 빠져나와 호젓한 산길을 걸었다. 제법 넓은 비포장 도로에는 오고 가는 사람들이 없어서 이어폰의 볼륨을 높이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한껏 기분을 내었다. 곧 산길이 끝나고 무슨 문화회관 같은 것이 나왔다. 그리고는 계속 길 왼편으로는 동네가 계속 되었는데, 낮은 담장 안에 동백꽃이 빨갛게 피어난 것을 보니,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공평하게 찾아와주는 봄이 고맙다. 어느집 대문간에는 흥부네 자식같은 올망졸망한 강아지들이 햇볕을 쬐며 한가로이 누워있었다. 생긴 것이 다 제각각인걸 보니  그 녀석들 어미도 새끼수만큼 일 수도  있겠다 싶어 웃음이 나왔다.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살기가 괜찮은지 제법 "立春大吉"이라고 써붙여놓은 곳도 있고, 차도 많아졌다.

 


명륜동에서 지하철을 타고 범어사역으로 가니, 역에서부터 범어사까지가 3Km나 된다고 한다. 택시를 타고 범어사 입구까지 갔다. 유럽에 갔을 때 친구와 나는 원데이 티켓(하루종일 버스, 지하철, 트램을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을 산날은 죽어라 걸어다니고-.-; 원데이 티켓이 없는 도시에선 꼬박꼬박 버스와 트램을 탔던 생각이 났다. "야, 우린 왜 이러냐?" 이러면서 낄낄거렸는데...

 

 

범어사는 일주문 부터가 특이하다. 아마 내가 다녀본 절중에서 일주문에 제일 많은 현판이 달린 곳이 아닐까 싶다. 보통의  일주문에는 "○○산 □□사" 라는 현판이 있기마련인데 이곳엔 왼쪽부터 "금정산 범어사", 가운데의 "조계문", 오른쪽의 "선종대본산"이라는 현판 세계가 나란히 걸려있어 범어사의 사찰 성격을 잘 나타내어 준다. 범어사의 창건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와 관련이 있는데, 의상대사 시절의 불교는 화엄종이었다. 그런 화엄사찰이었던 범어사에 선찰대본산이라니. 화엄사찰로 출발하여 선종사찰로 그 성격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절의 기본 구조는 화엄사찰의 구성을 따르고 있어서 일주문-천왕문-불이문-대웅전이 일직선상에 있고, 조금씩 높아지는 구조다. 그리고 범어사 일주문은 사진에서 보면 알겠지만 특이한 양식을 보여준다. 보통 우리 건축은 낮고 평평한 주춧돌에 긴 기둥을 세워 지붕을 받치게 되어있다. 그러나 범어사 일주문은 주춧돌이 길고, 목재기둥은 아주 짧다. 복잡한 지붕의 장식들을 안정감 있게 받쳐주기 위해서 그런건가... 여튼 김장독처럼 커다란 주춧돌은 신기하기만 하다.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천왕문이 보이나, 오른쪽에 삼국시대 사찰답지 않게 뾰족한 다층의 석탑이 보여 그쪽으로 새 버렸다. 신라석탑의 완성형은 석가탑이다. 안정감있는 몸돌과 간결하면서도 힘찬 3층의 완벽한 균형미와 상승감...그러데 범어사 앞 마당에 있는 이 탑은 세어보진 않았지만 7층쯤 되었던 것 같다. 근래에 세워진 듯...영 마뜩치가 않은 것이...

 

 


탑을 지나니 요즘 사찰마다 유행이라는 중창불사가 한창이었고, 단청도 새로 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꼴이 어찌나 보기가 싫던지. 요즘 하는건 왜 그리 시원찮은지 모르겠다. 황룡사지에 가보면...목탑자리만 100평이다. 비록 심초석만 남아있지만 요즘 새로 짓는 것처럼 허술하게 짓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얼마나 터를 다졌으면 몽고침입때 불탄 탑자리가 아직도 남아있을까...지금 짓는 저 건물들이 과연 몇백년은 고사하고 몇십년이나 버틸지...

 

 

 

 

범어사는 일주문 만큼 특이한 것이 지붕장식이다. 첫번째의 사진은 물고기가 꼬리 지느러미를 들고 있는 모습이고(사진에 잘 안나왔다.) 두번째은 용모양(관음전), 세번째은 도깨비(관음전)같은데 해질 무렵이라 사진이 너무 검다. 네번째은 일주문 근처의 다층 석탑 사면을 지키고 있는 사신상인데 금강역사는 아닌 것 같고, 얼굴이 서역인같다. 다섯번째은 암자로 가는 길에서 만난 3층석탑의 몸돌에 새겨진 조각이다. 그 모양이 특이하고 해학적이라 불교보다는 민간신앙에 가깝게 보인다.

 

 

 


                                                <대웅전의 석등과 계단옆의 조각>

 

 

 

대웅전앞에서 사진 찍다보니 밧데리가 다되서 다시 일주문 앞의 간이매점까지 내려갔다. 이번에는 순서대로 일주문-천왕문-불이문을 지나왔는데 불이문 옆의 대숲이 아주 푸르고 좋다. (이번 소풍에선 삼각대를 한번도 안 썼는데, 내 어깨가 기울었는지 사진이 대부분 수평이 안 맞다...ㅠ.ㅠ)

 

 

 

 


                                                     <불이문과 불이문 옆의 대숲>

 

 

 


                                             <대웅전앞의 소맷돌(해태)와 관음전의 문고리>

 

 

 

 

조금 경박해보이는 아래의 여러 건물들과는 달리 대웅전부터 옆으로 관음전, 팔상독성나한전 같은 건물들은 세월의 흔적이 물씬 풍기는 자태를 보여준다. 특히 팔상독성나한전은 3개의 전각이 한 건물에 들어있는 독특한 모양새다. 중간의 독성전은 입구가 아치형이라서 그것도 신기하고. 작은 문고리나 문설주 같은데도 장식이 새겨져 있어, 범어사를 지을 때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녹이 낀 그 예쁜 문고리엔 무식하게 커다란 자물통이 달려 있어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천박한 이기주의를 상징하는 듯했다. 팔상,독성,나한전앞에서 왠 스님이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그래도 산빛이 보라빛을 띠고 있어서 봄이 멀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는데...지붕의 도깨비 장식을 찍고 있는 우리를 부르면서


"저 산 한번 보세요. 한 겨울 산빛이 아니지요? 아무도 산에는 눈길을 안주네"
하시는데...그 스님 참...영 땡중은 아니구나 싶었다. ^^;;

 


                  <팔상전앞의 돌징검다리(?)와 대웅전앞의 삼층석탑(신라시대의 것인 듯...>

 

 

 

 

 

절집을 짓는데 옛사람들만큼의 정성은 바라지도 않는다. 제발 돈냄새만 풍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종교란 것이 본디 속세와는 다른 것인데 속세보다 더 천박하니...

 


사진에는 안나왔지만 범어사 경내는 제법 넓어서 여기저기 탑들도 많고, 양쪽으로 계곡을 끼고 있는데 왼쪽은 온통 바위투성이고, 오른쪽은 너럭바위들 사이로 맑은 물이 흘러서 잠깐 쉬기엔 정말 좋다. 몇사람이 둘러앉아서 밥먹어도 될만큼 넓직한 바위들이 지천이다.

 


절을 빠져나오면서 입구의 노천식당?에서 파전과 동동주를 먹었다. 해가 지고 난뒤라 바람이 차가워서 노천에서 먹는 것이 곤혹스럽긴 해도 날이 좀더 따뜻해지면 아주 운치있을 듯 했다. 추운데...찬 동동주를 먹으니...거참...-.-;;

집에 와서 다시 책을 찬찬히 보니, 범어사에서 안가본곳도 제법 되었다. 다음에는 좀더 꼼꼼히 둘러봐야겠다는 다짐을 하며...길고 지루한 소풍이야기를 접는다.

 




 


2020년에 옮겨 오면서...

 

처음은 홈페이지에 썼던것을 블로그로 옮겼다가, 다시 새 블로그로 이사를 하다보니 사진들의 링크가 전부 깨져서 다시 복원을 해야 할것 같다. 그 작업은 잠시 미루어 두고... 딱 읽어도 내 글임을 알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이랑은 많이 다른 문체와 엄청난 글자수의 압박. 이때까지만 해도 굉장히 텍스트형 인간이어서 말들이 많았는데, 요즘 나는 긴 글을 쓰면 자꾸 뭉텅뭉텅 덜어내고 싶어 질때가 많다. 엄청난 글자수와 투덜투덜한 말투를 보니, 어리고 철없고 에너지 넘치는 내가 보인다. ^^;;; 

 

아마 복천동 고분군은 혼자 돌아다녔던것 같고, 중간에 누군가 합류해서 범어사로 간것 같은데 같이 간 일행이 노숙자클럽인것도 같고, 짱언니와 나알지님인것도 같고... 왜 사람에겐 관심이 없었던건지. 일행이 누군지도 중요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