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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풍경

모항으로 가는 길 - 안도현

푸른밤파란달 2020. 6. 25. 20:36

2003년 채석강

 

 

모항으로 가는 길

 

안도현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

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 따윈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이야

비로소 여행이란,

인생의 쓴맛 본 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쯤 내동댕이 쳐보는 거야

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 거야

 

부안읍에서 버스로 삼십 분쯤 달리면

객짓밥 먹다가 석삼 년 만에 제 집에 드는 한량처럼

거드럭거리는 바다가 보일 거야

먼 데서 오신 것 같은데 통성명이나 하자고,

조용하고 깨끗한 방도 있다고,

바다는 너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대수롭지 않은 듯 한마디 던지면 돼

모항에 가는 길이라고 말이야

모항을 아는 것은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거든

 

모항 가는 길은 우리들 생이 그래왔듯이

구불구불하지. 이 길은 말하자면

좌편향과 우편향을 극복하는 길이기도 한데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드는 싸움에 나섰다가 지친 너는,

너는 비록 지쳤으나

승리하지 못했으나 그러나, 지지는 않았지

저 잘난 세상쯤이야 수평선 위에 하늘 한 폭으로 걸어 두고

가는 길에 변산 해수욕장이나 채석강 쪽에서 잠시

바람 속에 마음을 말려도 좋을 거야

그러나 지체하지는 말아야 해

모항에 도착하기 전에 풍경에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촌스러우니까

조금만 더 가면 훌륭한게 나올 거라는

믿기 싫지만, 그래도 던져버릴 수 없는 희망이

여기까지 우리를 데리고 온 것처럼

모항도 그렇게 가는 거야

 

모항에 도착하면

바다를 껴안고 하룻밤 잘 수 있을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너는 물어오겠지

아니, 몸에다 마음을 비벼넣어 섞는 그런 것을

꼭 누가 시시콜콜 가르쳐줘야 아나?

걱정하지 마, 모항이 보이는 길 위에 서기만 하면

이미 모항이 네 몸 속에 들어와 있을테니까

 

 

2008년 곰소염전